목회 한 단상

신앙ㅇ난감

빅 라이트 2024. 3. 7. 21:47

성도로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난감할 때가 있다. 신앙을 장난감 다루듯한 사람 볼 때이다. 이런 사람을 보게 되어 난감한 이유는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해야한다는 나름의 신념때문인것 같다. 왜냐하면, 동기와 원인이 어찌되었든 나는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순진하게, 책임감있게 해야한다는 강박(?)과 같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살아온 삶이 순탄치 않고 아픔이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겠고 또 개인적으로 겁이 많아서 또 다시 힘든 일이 생기기 전에 하나님께 아부(?)를 하기 위해서 마치 종이나 노예와 같은 심정으로 율법에 묶이고 스스로의 틀 안에 억압되고 갇혀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신앙생활을 내 기준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같이 보이는 신앙의 친구나 성도를 보았을 때 그를 나와 같은 신앙인으로 받아들이기가 쉽게 되지 않고 난감함을 느낄 때가 있었다. 오히려 화가 났다. 저렇게 편안하고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사는 삶을 살면서 어떻게 신앙이 유지된다는 말인가? 그러한 마음을 약 15-20년 전에 누군가를 보면서 그러한 마음이 들었을 때 마치 문화충격을 받은 것 같고, 솔직히 화가 났다. 나는 이렇게 힘들게 살았는데 저 친구가 누리는 것의 반의 반도 안되는 것 같은데, 저렇게 쉽고 자기 편한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저렇게 누리고 싶은 것을 다 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동안의 삶에 속은 느낌이며 화가 났다.

반면 신앙생활의 모든 활동을 장난감처럼 여기는 사람은 어떤가? 일단 신앙생활읕 한다는것은 일단 어느 정도 편차가 있겠으나 믿음은 있다는 것이다. 믿음 유무와 상관없이 삶의 태도가 가벼울 뿐일 수 있다. 그동안의 삶이 무난했으며 좋은 부모님과 가족과 환경 속에서 그냥 무탈하게, 평범하지만 자유롭게, 그리고 세상 살이의 지혜를 조금 일찍 눈을 뜨며 그저 조금 더 빠른 정신적 발달을 이루며 살아왔을 뿐이다. 물론 하나님의 다양성 안에서 허용되는 것이며, 그러한 사람 중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성도를 얼마든지 부르실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과거에 문화 충격받았던 나는 그러한 자유로워 보이는 친구들을 항상 부러워하고 추종하고 가까이하려고 하였으나, 현재의 나는 조금도 부럽지 않고 관심도 없고 연락조차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도 평안을 누리며 자유를 누리게 되었기 때문이며, 거기에도 다 장단점과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하며 난감한 마음이 들 정도로 늘 진지할 수도 있고 신앙생활을 장난감 다루듯 보일 정도로 늘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면 무엇이 옳은가? 여기서의 문제는 믿음의 유무가 아닌 삶의 태도와 스타일의 문제이기에 시시비비를 가릴 문제는 아닌것 같다. 오히려 삶의 태도의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또한 우리는 신앙을 때론 진지하게 때론 가볍고 유쾌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책임감과 자유 사이의 균형을 이루어야 하겠다. 그러는 가운데 나도 풍성해지고 교회도 다채롭고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며 세상에서도 다양한 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할렐루야!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7:5)"

 

미소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최준혁 목사입니다.
교회와 사역에 대해 교회 홈페이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misochurch.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