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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한 단상

대수롭지 않거나 대수롭거나

  우리 말에 '대수롭지 않다'는 말이 있다. 소중이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보다 덜 자주 쓰이는 것 같으나 '대수롭다'는 말은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어원적으로 보면, '대수롭다'는 ‘대사(大事)롭다’이다. 즉, '큰 일스럽다'는 뜻이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일을 대수롭게 여기는가? 또 어떤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가? 우리는 그동안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가치관에 따라 대수롭게 여기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의 구분이 생겼을 것이다. 그 구분을 짓는 기준은 분명 나에게 중요도에 따라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대수로운 것과 대수롭지 않은 것을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세상적인 논리로 말하더라도, 칼 융이라는 심리학자는 사람이 40세 전 후가 되면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을 이루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동안 살면서 억눌러왔던 무의식이 의식화 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어떤 사람은 그동안 억눌러왔던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하기도 한다. 점잖은 신사로만 살았던 사람이 큰 오토바이를 구입하여 스피드를 즐기는 스피드광이 되거나 얌전했던 숙녀가 자유분방한 스타일로 변화되기도 한다. 모두가 다 무의식적으로 삶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또 그렇게 되어야 건강하다고 말할 수가 있겠다.

  이처럼 우리가 그동안 대수롭게 여겼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긴 부분들을 무의식적으로 재검토하고 재조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듯이, 우리의 의식 속에서도 그동안 내가 의미부여했던 것에 대한 재검토와 수용이 필요하다. 특히, 신앙이라는 가장 핵심적인 가치관에서 그러하다.

  그동안의 삶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면,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대수롭게, 아니 대사(大事) 즉, 가장 큰 일로 여겨야한다. 그동안의 삶에서 사람을 의식하고 인정받고 도움을 주고 받고 공존하는 것이 중요하였더라도 오히려 내가 익힌 삶의 양식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내가 중요하게 여겼던 타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봄으로 인해서,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나 자신이 사실은 중요하고 꽤 쓸만하고 유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때 유명했던 베스트셀러 중에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이라는 책이 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있을 때, 사람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실험적으로라도, 그동안 익숙했고 대수롭게 여겼던 것을 끊고 중단해보고,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내가 가진 것들로 살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참 발전과 성장이 있게 될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믿음의 실험을 해보길 바란다. 다름 아닌 하나님을 더 많이 의존, 의지해보는 것이다. 평상 시 사람에게 물어보고, 사람에게 하소연하고 사람에게 나누었던 고민들을, 사람들에게는 일체 중단한 채, 하나님께 시시콜콜 해보는 것이다. 엄청난 실험적 도전이며 영적 도전, 믿음의 도전이 될 것이다. 그리함으로써,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영역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길 바란다. 그동안 대수롭게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음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그만큼 인생이 성숙해지고 깊어지고 강해지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8-19)"

 

미소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최준혁 목사입니다.
교회와 사역에 대해 교회 홈페이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misochurch.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