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신앙생활, 교회생활에서도 성도의 교제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게 앞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가족이든, 이웃이든, 성도이든, 타인이든 상대방의 가치를 알고 존중하며 함께 하기 위해서는 반대로 홀로 있을 수 있어야 한다. 홀로, 외로움을 처절히 느껴본 사람이야말로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을 귀한 줄을 모르고 피상적으로 이기적으로 도구적으로 대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스스로 또 서로 속이게 될지도 모른다.
"나의 벗 아브라함(사 41:8)"이라고까지 칭함을 받게 된 아브라함은 그렇게 인정받기까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번제단에 올리기 위해 목숨을 끊기 직전까지 갔다. 시늉만 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칼로 내리치려는 순간에 하나님이 막으셨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내어드리고 자기 자신마저도 홀로 하나님 앞에 서서 온전히 하나님께만 자신의 마음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떠신가? 마찬가지로 독생자 아들 예수님까지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나를 사랑하신 분이시다. 그의 아들 예수님은 어떠신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시고 홀로 지옥에까지 다녀오신 분이시다. 모두의 공통점은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상대방 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을 내어주고 단독으로 홀로 있게 되는 외로움까지도 감수하겠다는 것을 보여주신 분들이시다. 우리는 오히려 외로움을 느낄까봐 하나님 손도 붙잡고 가족 손도 붙잡고 친구 손도 붙잡고 세상의 손도 붙잡고 돈과 허영과 사치와 명예와 오락의 손도 붙잡고 다 붙잡는다. 그 결과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붙잡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어느 것 하나 진정으로 붙잡기 위해서 다 놓는 위험을 선택해야 한다. 외로움을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친근한 대상으로 여겨야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위험을 무릅쓴 댓가로 주어지는 것은 무언가에 매이지 않을 자유이다. 또한 무언가에 의도적으로 매여줄 수 있는 자유이다. 우리는 상대방이 좋아서 상대방을 위해 자발적으로 매여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억지로, 무엇을 댓가로 상대방에게 매여주는 시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자체가 좋아서 매여줄 수 있는 자유롭고도 강하고 믿음직스러운 나 자신이 되기 위해 우리는 외로울 줄도 알아야한다. 그러할 때에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참 교제, 참 만남이 있을 수 있으며 그 어떤 사람과도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다. 할렐루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 4:13-14)"
미소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최준혁 목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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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isochurch.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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