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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한 단상

우리는 누군가의 꽃이 되고 싶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국어시간에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배웠다. 그 때에는 지식적으로만 알았지 그 깊은 뜻을 헤아릴 깜냥이 되질 못했다. 요즘 들어 문득 그 시가 떠올랐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길 바라고, 또 그렇게 될 때 힘을 얻는다. 다른 말로, 인정과 호감을 살 때, 칭찬과 격려를 받을 때 힘이 난다. 아무래도 우리는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이기에 단순히 좋고 싫고를 떠나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그 사회 안에서 나의 자리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라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는 없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그렇게 못하셨다. 아니, 그렇게 되도록 하시지 않으셨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서 의미있는 존재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내가 인정받을 대상이 누구이냐는 것이다. 그 대상을 정하는 것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무엇을 하려는가?"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달려있다. 개인의 신앙관을 포함한 인생관과 가치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런데 종종 안타까운 것은, 이 귀한 인생을 별 의미없는 일에 목숨거는 것을 볼 때이다. 세상의, 주위의 평판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떠돌듯 맹목적일 때이다. 세상에, 힘있어 보이는 존재에게 나를 맞추는 것이 익숙하며 필요에 따라 내가 맞춰주고 의미를 줄 존재를 갈아탄다. 자신도 모르고 세상의 인정이 삶의 목표다. 사실상 정신적, 영적 떠돌이와 같은 상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분명한 삶의 목적이 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함께 한다는 친밀감을 느끼게 해주시기 전에,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대상은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 고독을 먼저 경험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많은 인물이, 심지어 예수님 마저도 광야와 고독을 마주해야했고 그 시간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함께 해주심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우리는 하나님께 의미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과 같은 것은, 나는 아무에게도 아무 의미없는 존재가 되는 경험을 통과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이 나를 의미있는 존재를 받아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될 것이며, 그것 하나만으로도 실제로 아무도 나에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은 절망, 외로움, 좌절의 시간이 오더라도 견디고 넘어갈 수가 있다. 결국엔 다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을 붙여 주시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신다. 할렐루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이사야 43:21)"  

 

미소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최준혁 목사입니다.
교회와 사역에 대해 교회 홈페이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miso.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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